책에는 ‘분노’가, 영화에는 ‘위로’가 넘친다

뉴스레터 ‘시네마 천국과 지옥’은 최신 개봉작부터 다시 보고 싶은 걸작까지 영화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스크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영화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이 사랑방에서 취재 뒷이야기와 비장의 걸작 리스트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매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오늘은 넷플릭스와 국내 극장을 통해서 개봉한 영화 ‘힐빌리의 노래’와 원작인 자전적 수기의 차이를 김성현 기자가 비교해 드립니다.  

넷플릭스 영화 '힐빌리의 노래'

최근 개봉한 ‘힐빌리의 노래’(감독 론 하워드)는 미 변호사 J.D. 밴스의 자전적 수기에 바탕한 영화입니다. 밴스는 약물 중독에 시달리는 편모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과 싸우면서도 해병대에 입대해서 이라크에서 복무한 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입지전적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은 미 북부의 쇠락한 공업 지대를 뜻하는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입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우세 지역으로 분류됐지만, 2016년 미 대선 당시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줘서 화제를 모았지요. 책의 제목에 나오는 ‘힐빌리(Hillbilly)’는 교육 수준이 낮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일컫는 말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이고 멸시적인 표현으로는 ‘백인 쓰레기’라는 뜻의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도 있습니다. 2016년 미국에서 출간된 밴스의 에세이는 트럼프 시대의 백인 하층민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으로 꼽혀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엘리지(Elegy)’는 한국에서 노래로 번역됐지만, 정확히 말하면 ‘애가(哀歌)’에 가깝습니다. 슬픈 노래라는 뜻이지요.

영화의 원작인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물론 이 책에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전적 수기이자 사회학적 보고서라고 해도 좋은 이 책에는 백인 하층민의 분노와 자기 비하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저자는 고교 시절부터 동네 식료품 잡화점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겹게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지요. 그 뒤 실업 수당에 의존하는 빈곤층 주민들을 점차 불신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합니다. “이웃집 마약 중독자는 적어도 내가 급여를 받는 횟수만큼 티본 스테이크를 사 먹었다”(한국어판 222쪽)는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급기야 책에서 밴스는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던 민주당의 정책이 사실 허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이처럼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를 요약하는 말을 찾는다면 바로 ‘분노’입니다.

물론 이 책은 정치학 교과서나 선동적인 팸플릿은 아닙니다.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을 간신히 붙잡은 백인 하층민 출신의 자기 고백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겠지요. 하지만 러스트 벨트 지역의 백인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는 데 간접적인 힌트를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전 세계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엘리트의 이미지 덕분에 적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 하지만 밴스는 같은 이유 때문에 미들타운 주민들이 오바마 대통령을 이방인으로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명확하고 완벽하게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그저 생경하고 그의 스펙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다. 오바마는 복잡한 대도시의 시카고에서 자랐으며,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가 자신을 위해 펼쳐진 사회임을 아는 듯이 매사에 자신감 넘치게 행동한다.”(한국어판 301쪽)

한국에서도 좋아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백인 하층민 유권자들이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밴스는 온라인 결제 시스템인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 틸의 벤처 캐피탈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지요. 피터 틸은 트럼프를 비롯해 보수 성향의 정치인을 앞장서 후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넷플릭스 영화 '힐빌리의 노래'

하지만 ‘다빈치 코드’ 시리즈와 ‘뷰티플 마인드’ ‘아폴로 13’을 연출한 론 하워드 감독은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인식될 만한 요소들을 영화에서 ‘각질 제거’하듯이 깨끗하게 덜어냅니다. 사회 비판적 수기보다는 가난과 시련을 이겨낸 청년의 고군분투 성공기라는 한 편의 동화로 탈바꿈시키지요. 실제로 하워드 감독은 국내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책을 읽었을 때 매우 공감을 했는데 사회 정치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라 가족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연출 의도를 밝혔습니다.

1977년 첫 영화를 연출한 백전노장 하워드가 흥행에는 도움이 안 되고 논란만 키울 만한 선택을 했을 리가 없지요. 책이 뜨거운 ‘분노’로 가득하다면, 영화에선 따스한 ‘위로’가 넘쳐 흐릅니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비중이 두드러지는 두 배우가 주인공의 할머니 역을 맡은 글렌 클로즈와 어머니 역의 에이미 애덤스입니다. 애덤스는 약물 중독과 싸우는 어머니 역을 위해서 20파운드(9kg) 가까이 살을 찌웠지요.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끝까지 고통을 주는 사람도, 그 고통으로부터 끝까지 주인공을 지켜주는 사람도 모두 가족이고 여성이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특히 글렌 클로즈는 한국의 첫 직배 영화인 ‘위험한 정사’(1987)부터 ’101 달마시안'(1996)까지 악역으로 정평이 난 배우입니다. 설령 클로즈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한국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에 불을 붙인 할리우드 영화 ‘위험한 정사’의 주연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분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참고로 민주당 지지자인 클로즈는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을 후원하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넷플릭스 '힐빌리의 노래'에서 할머니 역의 글렌 클로즈(왼쪽)와 에이미 애덤스.

천하의 악역 배우인 클로즈도 1947년생으로 어느덧 일흔이 넘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담배를 물고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손자 밴스가 엇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강인한 할머니 역을 열연했지요. 클로즈는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연기할 역할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를 마친 뒤 촬영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분이었다. 고관절 통증을 앓았고 유머 감각도 화끈했다. 제가 집중한 건 어떻게 보면 거의 명상과도 같은데, 그 인물 안으로 그저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힐빌리의 노래’는 클로즈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클로즈는 토니상과 골든 글로브 등은 수상했지만 아카데미상은 7차례나 후보에 오르고도 아직 인연을 맺지 못했지요. 이 때문에 ‘수상 경력이 없는 여배우 가운데 최다 후보 지명’이라는 다소 달갑지 않은 기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과연 내년 4월에 열릴 예정인 아카데미상에서는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흥미로운 마지막 관전 포인트입니다.